.........................................- 최 승 호 지음, -
.. 댓잎들도 흔들리지 않는, 바람 자는 숲속 길을 걷다가 문득 범종소리를 들었다. 살아갈수록 멀어지는 진심(眞心)이 내 안에도, 진흙 속의 푸른 하늘처럼 펼쳐져 있음을 일깨우는 저 범종소리에, 이미 대나무며 상수리나무들은 다 깨달아 별스런 일도 없는데, 오직 나 하나만 먹통으로 남아서 무쇠공 같은 업덩어리를 쪼개겠다고 벼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나 하나만 천하의 먹통이라면 저 범종 소리는 다름 아닌 무쇠공 같은 나를 깨기 위해 저렇게 거듭 울리고 있는 것이리라.
..# .....최승호 산문詩集(아침바다) ....『 달맞이꽃 명상 』중에서
...... □.시인의 말
..1995년에 펴낸 시집《반딧불 보호구역》은 1993년 세계사에서 펴냈던《달맞이꽃에 대한 명상》의 선집이라고 할 수 있다.《반딧불 보호구역》을 출간한 뒤로《달맞이꽃에 대한 명상》은 절판되었고 어떤 아쉬움 속에서 10년이 흘렀다. 형식이 내용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던 아쉬움, 140편의 글을 누가 한 권의 시집으로 출간해 서점에 내놓았겠는가. ..그런 아쉬움을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는 출간의 인연이 찾아온 것이 기쁘다. 나는 오래된 디스켓을 다시 찾았고 내가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그것은 내 인생의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던 시절에 씌어진 글들이다. 가평 화악산 한 기슭의 외할머니집에서, 춘천 아우의 집에서, 그리고 남도의 절간으로 떠돌면서 나는 이 글들을 썼다. 고집했던 시의 틀에서 벗어나, 말 못하며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말을 대신하듯이, 나보다 훨씬 아름다운 나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 글들을 썼다. 역설적이게도 그 어두운 시절에 쓴 글들은 밝다. ..디스켓 속에 발표되지 않고 남아 있던 글 몇 편을 이번에 새로 싣는다. 부분적으로 글을 손질했으나 전체적으로 내용은 그대로이다. 편집은 우연성을 존중하듯이 디스켓에 저장된 순서를 따랐다. 책의 제목을〈달맞이꽃 명상〉이라 했다. 천진성과 유머를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어린애 그림을 삽화로 넣어 보았다. 그 애는 그 글들을 쓸 때는 이 세상에 없었던 존재, 지금은 구룡초등학교 3학년이고, 이름은 여래이다.
...............................................2004년 5월 ........................................포이동에서 최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