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없이 산계곡 길을 걷고 싶어라 가을에 맑아서 이승이 아닌 것만 같은 산기슭에 앉았다가 드러누웠다가 단풍처럼 얇아진 얼굴을 들고 서고 싶어라 길어진 햇살을 받아 빛나는 몸으로 어두워지는 길을 따라 걷고 싶어라 어느 별에서 누군가 바라보며 아득한 저곳에도 별이 있다고 말할 때까지 텅 비어져 은빛으로 울리는 내 가슴을 홀로 들여다보고 싶어라
.# ...나해철 詩集(文知 詩人選ㆍ171) ..『 긴 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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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文 ....- 서정으로 담은 우리들의 자화상,
...........................- 박몽구(시인ㆍ문학박사) -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빛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와 벽지에 남은 어린 아들의 희미한 그림이 보인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린다 베란다를 지나는 바람과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들린다 지친 몸일 때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그들이 안 들리던 그들이 눈도 귀도 어루만지며 곁에 와 함께 눕는다
-「집」全文,
..아무렇게나 한 편 골라본 시지만, 나해철의 특장이 그런대로 훤히 비친다. 작은 일에 따스한 마음을 드리우고, 허장성세를 취하기보다는 평범한 삶의 잔영에서 기쁨을 맛보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잔잔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조사법은 첫 시집『무등에 올라』에서부터 일관되게 견지되어온 것이다. 여느 시인들의 경우에는 작고 잔잔한 것들을 노래하다 보면 자칫 비감에 젖은 서정으로 끝나게 마련인 데 비해, 나해철의 詩들은 잠깐 콧등을 시큰하게 만들다 이내 잠잠해지고 마는 페이소스를 넘어 이 시대의 사람들이 함께 가슴앓이하고 있는 정서에 자연스레 연접된다는 데 특장이 있다. ..나해철은 결코 큰소리를 치지 않는다. 때로 덩치가 큰 꽃으로 압도하는 서양란 카탈리아보다 여리고 가는 숨결로 일관하는 소심(素心)의 아기자기한 꽃 한 송이가 은은하게 나그네의 가슴 밑바닥을 훑듯 나해철의 시를 읽는 이들에게 쉽게 다가와 깊게 싫지 않은 상처를 새기곤 한다. 이번 詩集에서도 예의 나해철의 체질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말수가 줄어들고, 어지러운 세상을 향한 일침을 더욱 삼투시키고 있다. ..변화의 진정한 실체가 육화되기도 전에 헌신짝처럼 시적 태도를 바꾼 이들을 적잖게 보아왔다. 예전의 올곧은 태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언어의 유희로 일관하거나, 얄팍한 대중주의에 몰려 뿌리 없는 서정으로 일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른바 매체를 장악한 기득권층들은 자신들의 아성을 지키기 좋은 몇몇 고정 필자들에게만 문을 열어놓을 뿐, 오늘이 있기까지 음양으로 보이지 않는 기둥이 된 대다수 동지들에게는 굳게 문을 닫아걸어버렸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가 나해철의 새로운 시집을 만나는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는 요즈음 그만하면 그 동안 닦아놓은 결실이나 뒤집으며 살 만하지 않은가 하는 세인들의 잣대를 멀리하며, 다시 시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풍성한 자리보다 아쉽고 조촐한 자리에 더욱 오래 앉는 그를 보면, 모진 바람이 몰아치던 겨울 아버지가 아궁이에 넣었다가 꺼내주시던 구운 돌 같은 따스함이 며칠이고 사그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