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것은 모두 녹이 슬었다. 포(砲)들을 위장하듯 마음 구석구석에 감추어둔 감추고 검은 풀로 덮어둔 발화(發火)의 말뭉치들을 찾아보아라. 여기저기 겨울 지난 거미줄들 날아다닌다. 마른 풀들도 날아다닌다. 마음의 뚜껑을 잠시 열고 옷깃 여미고 국도(國道) 벗어나 멀리 가지 못하고 주저앉은 마을을 벗어나 말없음을 벗어나 더 큰 침묵을 향하여 걸어가보아라. 지리산 중턱에는 아직 눈과 바람이 남아 있지만 강 건너 복숭아밭의 검은 줄기들은 꿈의 문자(文字)들처럼 싱싱하다. 싱싱하다, 생전 처음 보는 낙서처럼 신나게 읽어보려무나. 물가에 신발 가지런히 벗어놓고 전쟁 예보와 비누로 더러워진 옷도 벗어놓고 마음은 뚜껑 열린 채 내던져놓고 뒤돌아보지 않고 눈감고 혼자 초봄 저녁 강을 건너는 자의 뼈 시린, 뼈 시린 따사로움. 돌들이 걸린다. 발가락들이 전부 살아 있었구나, 속삭이듯 속삭이듯 길 하나 없는 이 길의 편안함.